느린 호흡으로 그린 낭만
상태바
느린 호흡으로 그린 낭만
  • 김현비
  • 승인 2019.09.02 0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럽의 기차 안, 시끄럽게 싸우는 두 독일인 부부 때문에 프랑스 여자 셀린느는 자리를 옮긴다. 맞은편에 앉게 된 미국인 남자 제시는 가볍게 한두 마디를 건네고,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끝날 줄을 모른다. 자신의 종착역 비엔나에서 제시는 셀린느에게 함께 내리자고 말한다. 그렇게 비엔나에서의 잊지 못할 하룻밤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비엔나를 배경으로, 둘은 즉흥적으로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사랑부터 죽음까지 매우 다양하며, 깊이 있는 생각과 얕은 이야깃거리를 넘나든다. 이 둘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오로지 대화로 그려진다.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고, 설레고, 깊은 교감을 나누고, 생각과 다른 상대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다시 즐거워하고. 이 모든 과정이 특별할 것 없는 대화들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극적인 사건 없이 대화만으로 전개되는 설정 때문에 영화는 매우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실제로 낯선 여행지에서 남녀가 만나 대화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은 감독인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경험담이며, 그는 당시의 기억을 살려 작품 전반을, 특히 셀린느가 제시를 따라 내리는 장면을 최대한 개연성 있게 그리려고 노력했다고 밝힌 바 있다. 대사의 흐름과 배우들의 연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사실 이는 지루할 만큼 반복적인 리허설과 세심한 연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작품에서 촬영을 한 번에 진행해 편집을 최대한 적게 하는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한다. 영화 시간의 속도는 편집의 횟수와 반비례하기 때문에, 영화 속 시간은 매우 천천히 흘러간다.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를 관람하는 게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 더 나아가서는 영화 속에서 둘을 지켜보는 제3의 인물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바로 이 자연스럽고 느린 호흡이 역설적이게도 작품의 가장 극적인 요소다. 현실적인 설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의 로맨틱한 일들이 충분히 개연성 있다고 느끼게 하고, 혹시 자신의 삶 속에도 그런 사랑이 나타나지 않을까 꿈꾸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낯선 사람과 첫눈에 반해 함께 낭만적인 하루를 보내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

결말 부에서 주인공들은 관계가 지루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어떠한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은 채 1년 후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는 막연한 약속만 남기고 헤어진다.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이 둘이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속 한편으로는 어쩌면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하는, 이것이 바로 작품의 매력이다.

김현비 기자 hyunbeeki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