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못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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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지 못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 김도연
  • 승인 2019.10.1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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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카메라가 머무는 곳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20대에 처음 산 카메라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을 향했고, 이후에는 투쟁하는 노동자, 위안부 피해자, 재일 커뮤니티, 세월호 유가족들을 꾸준히 담아왔다. 오늘도 우리에게 닿지 못한 목소리를 비춰주는 안해룡 동문을 만나봤다.


처음 카메라를 잡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별다른 계기가 없다”고 답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사기, 필름, 카메라 등에 친숙했다고. “80년대 당시는 ‘포토 저널리즘’, ‘비디오 저널리스트’라는 개념조차 잡혀있지 않던 때라서 보고 느끼는 것을 기록하는 게 전부였죠.” 그러던 중 그는 한 후배의 소개로 일본에서 명성 있는 프리랜서 사진작가 집단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 ‘포토 저널리스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포토 저널리스트로 여러 현장을 찾아다녔고 자연스럽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사진에 담게 된다. 그런데 일본에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일본에서 생존하고 계신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지난 10년간의 재판 과정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문제는 언어였어요. 그때는 일본어도 할 줄 몰랐는데 스탭들까지 전부 일본인이었거든요.” 전달받은 자료를 정리하는 데만 1년을 쏟았다고. 1시간이 넘는 영상을 기획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애를 많이 먹었지만 그는 할머니가 가진 힘과 신념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할머니는 단순히 일본군을 비난하지 않았어요. 정확히는 일본 정치와 권력에 대한 비난이었죠. 민족적 개념보다는 잔혹한 국가 권력에 희생당한 일반인을 주목했어요. 할머니가 전쟁반대 메시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기도 해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큰 힘이 됐다. 할머니의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자발적으로 모금을 시작했고 1년 동안 6,000만원이라는 금액이 모였다. 모금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이후 본인의 지역으로 돌아가 지역 상영회를 개최하는 주축이 됐다고. 이렇게 자주적인 제작, 배급, 유통을 거친 기념비적 작품이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이다. “감독으로서 이런 작품을 연출할 수 있어 큰 영광이었다고 생각해요.”


최근 몰두하고 있는 작업으로 그는 직접 기획한 시사IN ‘흩어진 역사 잊혀진 이름’ 사이트를 보여줬다. 그는 1995년부터 일본 현지를 돌며 조선인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를 쫓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위령비는 일본 내 약 160곳으로 그는 이 가운데 100여 곳을 직접 찾아갔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철도, 탄광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희생당한 것을 확인했다. 일본의 자본권력과 군인권력이 조선을 얼마나 구조적으로 침탈해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 근대화의 ‘심장’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일본 우익들이 ‘일본 덕분에 한국이 이만큼 살게 됐다’고 말하곤 하죠. 그 근거 없는 주장을 완전히 반박할 수 있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기술보다 사유와 사색을 키울 것’을 강조했다. “기술로 무장된 이후에는 사고를 주입할 수 없어요. 사회를 보는 눈, 사물을 보는 눈, 대상을 이해하는 눈을 키우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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