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광화문, 좀비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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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광화문, 좀비필름
  • 이대연(영화평론가)
  • 승인 2016.12.0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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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에 사람들이 넘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촛불의 인파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촛불과 사람이 만들어낸 거대한 해일이다. 모두들 천천히 어디론가 향한다. 뛰는 이도 없다. 질서정연한 혼돈이다. 문득 낯선 느낌에 주위를 둘러본다. 멈춰버린 자동차들, 정지된 듯한 세계, 도로 위를 느릿느릿 부자연스럽게 걷는 사람들. 좀비 영화의 장면들이 빠르게 오버랩되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불경스러운 상상을 지우려 세차게 도리질을 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부터 <워킹데드>나 <랜드 오브 데드> 같은 미드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촛불 시민들을 두고, 무례하게도 좀비라니…. 해명할 말들을 찾아 기억의 책장들을 더듬어본다.
좀비가 아이티의 부두교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뱀파이어와 함께 호러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괴물이기는 해도, 이들의 원형은 루마니아의 블라드 째패쉬나 프랑스의 질 드레처럼 포악하고 잔인한 귀족이 아니다. 단지 악의적 주술로 죽음에서 돌아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가혹하게 착취당한 농장노예에 불과하다. 이들이 대중서사의 소재로 등장하여 하나의 장르로 정착하게 된 작품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지만, 좀비 영화의 효시가 된 최초의 작품은 할페린 감독의 <화이트 좀비>(1932)이다.
호러 장르의 미덕이라고 하면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당대 사회의 공포에 대한 정확한 포착에 있을 것이다. 좀비 역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공포의 내용을 달리하며 변주되어 왔다. 1930년대의 좀비가 흑인 해방에 대한 백인들의 공포를 담고 있다면, 냉전이 극에 달한 1960년대의 좀비는 핵과 방사능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그러나 좀비라는 존재에는 좀 더 근원적인 공포가 있다. 그것은 이들이 무덤이라는 한 장소에 붙박여 은폐되지 않고 살아서 움직이고 돌아다니며 온몸으로 죽음을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은 삶의 유한성을 상기시키며, 언젠가 닥칠 죽음의 실체를 목격하게 한다. 그들은 과거 이루어진 타자의 죽음이자 미래 도래할 나의 죽음이기도 하다. 과거와 미래는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 좀비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인 셈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특성, 다시 말해 평범한 인간과 좀비의 동일화는 2000년대 이후 재난서사와 만나며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이를테면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좀비 재난서사의 한국적 변형이다. 영화 속 좀비는 바이오 기업에서 유출된 바이러스로 인해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 업체는 주식 딜러인 주인공 석우 일당이 이른바 작전을 통해 살려낸 기업이다. 여기서 좀비는 부도덕한 기업과 금융자본이 협력해 만들어낸 희생양이다. 그들은 공격자이며 동시에 희생자이고, 가족이면서 동시에 괴물인 것이다. 연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인 <서울역>에서는 이를 보다 끔찍하게 보여준다. 좀비를 폭도로 규정한 정부는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도망하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다. 좀비와 시민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 시스템의 부재로 공공의 안전망이 붕괴된 상태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해체된다. 결국 좀비란 재난의 다른 이름이며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정권과 금권이이 만들어낸 산물이자 희생양인 것이다.
축축한 한기에 몸서리치며 정신을 차린다.  다시 촛불의 인파다. 비로소 내가 본 좀비의 의미를 이해한다. 나와 이들 모두가 재난서사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깨닫는다. 어느새 이만큼 걸어왔는지 멀지 않은 곳에 이순신 장군이 보인다. 그 아래 백만 개의 촛불이 일렁인다. 울돌목 앞바다를 지나다 가라앉은 배와 그 안에 타고 있던 아이들과 눈 뜨고 바라만 보던 나 자신을 기억하며 마른침을 삼킨다. 장군의 동상 아래로 백만 개의 소리 없는 절규가, 백만 개의 세월호가 떠내려간다. 촛불을 받친 종이컵에 고인 촛농이, 그가 흘린 뜨거운 눈물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대군에 맞서 불가능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끝내 침몰하는 배 한 척을 구하지 못한 장수의 통곡이 백만의 함성이 되어 밤하늘에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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