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편’과 느린 걸음에 대한 예찬
상태바
‘뒤편’과 느린 걸음에 대한 예찬
  • 김지윤(문학평론가)
  • 승인 2017.03.13 19: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양희 시 『뒤편』에는 인상적인 구절이 하나 있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라고. 백화점의 화려한 마네킹의 앞모습을 보며 그 뒤편에 꽂혀 있는 무수한 시침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시인의 시선이다. 무한경쟁의 성과사회는 사물의 ‘앞면’만을 보듯 결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눈물과 간절한 기도, 노력을 지워버리곤 한다. 화려한 마네킹처럼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눈을 빼앗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뒷면에 있다. 뒤편이 있기 때문에 삶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 될 수 있다. 끝없이 일직선으로 전진할 것을 요구하는 직선적 사회에서 개개인의 삶은 사라진다. 인생은 뒤를 돌아보고, 걸음을 멈추고, 숨겨진 것과 가려진 것들을, 소외되고 잊혀진 것들을 생각하는 그런 순간에, 의미를 획득한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천천히 걷는 즐거움을, 눈에 잘 띄지 않고 가려진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발견하는 기쁨을 나날이 더 많이 잃어버리고 있다. 시간에 쫓기거나 스마트폰에 눈길을 묻으며 급하게 걸어가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언제나 정해진 길을 최단거리로 걷는 데 익숙해질수록 사람들은 뒤를 돌아볼 줄도, 시선의 밖에 있는 작고 숨어있는 것들에 눈길을 가져갈 줄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어릴 때부터 나는 무작정 걷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이 많은 길보다 인적 드문 뒷길이 좋았고, 대로보다는 골목이, 숲길도 잘 조성해놓은 산책로보다 작은 오솔길이 좋았다. 그런 데서는 생각의 보폭에 맞춰 걸을 수 있고, 시간도 나만의 템포로 흘러갔다. 하지만 이런 작은 길들은 점점 사라져간다. 개발되고, 상업화되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꾸 현실의 시간이 흘러들어 온다. 유명해지기 전부터 나에게 소중한 공간이었던, 제주 올레길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내가 제주도에 한동안 머물러 살던 수년 전과도 사뭇 다르다. 관광지로 개발되고 나니 올레길은 일종의 문화상품이 되어버렸다. 올레길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전, 그 길들은 마치 어렸을 때 내가 걸었던 동네 길들 같았다. 시골에 살았던 시절, 강가의 한적한 오솔길과 갈대밭을 지나 초등학교에 가던 그 작은 길들.
어렸을 때는 시간이 참 느리게 간다. 마치 ‘걷기’와 같다. 느린 걸음처럼 나날이 많은 일과 경험, 지식을 쌓아나가며 기억의 장면도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흘러가는 시간의 편린들은 기차 차창 밖에 스쳐가는 풍경처럼 무의미하고 빠르게 지나가 버리곤 한다.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을 소모적이고 허무한 것이 아닌 가치 있고 소중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 아이처럼 걸음을 멈추어 삶의 몇몇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우는 일이 필요하다. 빠르고 목적 있는 걸음만 걷는다면 풍경에 의미가 없어지고, 모든 길은 그저 목적지에 닿기 위해 지나가는 과정이 될 뿐이다. 이런 걸음에는 ‘질문’이 없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한, 성과 달성의 수단일 따름이므로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왜 걷는지, 걸어가는 길 자체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유한한 삶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걷는 시간’을 상실하는 셈이 되고 만다. 그리고 길을 잘못 들거나 그 목적지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을 경우에도 문제점을 깨닫기가 매우 어렵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면 자신의 걸음 속도를 유지하기 힘든 법이다. 성찰과 사유가 없이는 ‘걷는 기계’와 다를 바 없어진다.
현대인들은 쉽게 눈에 띄는 것, 다시 말하자면 ‘앞면’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이미지는 쉽게 소비되고 복제되며 의미는 가볍고 명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는 깊이와 무거움이 없기에 쉽게 휘발되어 버릴 수 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당연하지 않고,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분일 수 있으며 정작 중요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개 진실은 모호함 속에 있으며 쉽게 파악되지 않고 상식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회가 만든 허상일 수 있다.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사실’은 늘 의심되어야 하고, ‘오늘의 상식’은 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잘 보이는 앞면보다는 뒷면, 사물의 이면을 생각해야 한다. 지구에서는 늘 달의 앞면만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달을 평면으로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달은 입체의 구(球) 모양이며, 분명 뒷면이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아름답게 다듬어진 화려한 ‘앞면’들의 세상에서 핍진한 삶의 ‘무수한 시침’ 자국들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대개 뒷면에 있는 것들은 아름답지 않고, 상처투성이이며 어둡고 그늘져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들은 그곳에 있다. 뒤편을 잊지 말자. ‘사람다움’을 회복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천양희 시인의 표현대로 ‘생의 곡선’을 그릴 수 있으려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