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서 홀로 서야 하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 - 영화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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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서 홀로 서야 하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 - 영화 <우리들>
  • 이수향(영화평론가)
  • 승인 2017.04.11 2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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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된 맑고 순한 아이의 얼굴. 초등학교 체육 시간인 지금 막 피구의 팀을 정하는 참이다. 아이는 친구들의 가위바위보 결과에 따라 같이 웃고 같이 놀라고 같이 반응한다. 그러나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서 끝내 어색해지는 표정을 숨길 수 없다. 입술을 깨물며 눈치를 보던 아이는 결국 옆의 친구들이 모두 불려 나갈 때까지 부름을 받지 못하고, 마지막에 남은 아이를 놓고도 친구들은 마치 귀찮은 짐인 듯 상대에게 떠넘기려 한다. 어정쩡하게 게임에 참여하는 아이의 표정은 어둡다. 그때 한 친구가 아이에게 금을 밟았다고 나가라고 말한다. 안 밟았다고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아이는 친구들의 성화에 밀려나 금 밖으로 나간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6)은 11살 된 초등학교 소녀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암전 속,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먼저 도착한 이 기억할 만한 오프닝 씬에서 분명 상황을 주도해 나가는 것은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이지만, 카메라는 집요하게 아이의 표정에만 집중한다. 이는 이 영화에서 아이의 선한 눈망울과 표정이 직접적인 사건들보다 중요하게 비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친구가 없어 외로웠던 선이는 전학을 오게 된 지아를 만나고 둘은 방학 동안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개학을 하고 둘은 어느새 멀어져 있다. 선이는 지아의 변화가 이해되지 않고 다시 잘 지내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덥고 청명한 여름날과 확대경을 댄 듯 클로즈업으로 이루어진 두 소녀만의 세계는 선이집의 봉숭아꽃처럼 푸르게 피어오른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둘은 어느새 서로에게 스며든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한 아이의 외로움과 친구 되기의 지난한 과정을 보게 된다. 어린 소녀들의 세계는 예상과는 다르게 동화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미묘하고 잔혹해서 작은 말로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어 상대의 약한 곳을 파고든다. 손톱에 봉숭아물이 빠지는 시간은 우정이 갈라서게 되는 시간이자 그들의 아픈 내면이 깊어지는 시간이다. 둘 다 피구 선 밖에 나란히 서 있게 된 현실은 둘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보여주면서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는 대개 사춘기 소녀들 간의 ‘관계 맺기’ 과정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로 어른들을 위한 우화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 혹은 다른 이들에게 이해받으려 한다는 것은 소녀들의 차원만이 아니라 어른의 사정에서도 실은 굉장히 어렵고 불편하며 끝내 이뤄지기 어려운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말이다. 연인이나 친한 친구와 가까운 사이였을 때 둘 만이 공유했던 마음의 공간에서 주고받던 말과 행동들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면 타인들에게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신을 지켜내는 법을 모르는 어리숙하고 착한 선이,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두려워 나에 대한 상대의 선의를 그대로 받을 줄 모르는 지아처럼 우리는 서툴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상처를 낸다. 나의 아픔을 숨기거나 다른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또 다른 이를 향한 가해의 행위에 연루되기도 한다. 다 커서 어른이 되면 이해나 인정에의 욕망 또한 가벼워질 거라 기대했지만, 결국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외로워진다.
 새 학기, 새봄, 푸릇푸릇한 싹들이 돋아나고 모두들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느껴진다면, 다른 누군가와 원만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해 여전히 자책하고 있다면, 혹은 누군가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불러내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곧 나아질 거라는 쉬운 위로를 건네고 싶지는 않다. 무리의 거리 두기와 구별 짓기 사이에서 모욕감과 수치심만이 강해질 뿐이라면 다만, 일단 멈추어도 좋다고만 말해두고 싶다. 앞으로도 어두운 밤과 끝나지 않을 불안이 계속될 것이다. 상처받을 일이 가득한 세상에서 타인의 이해와 지지를 받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힘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기르는 것이 먼저이다. 내 존재를 나 외엔 아무도 비춰줄 이가 없으므로 스스로 견뎌내어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장의 서사가 아니라, 결국 홀로 극복해내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뼈아픈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고통의 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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