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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당하는 인간과 문학적 삶
허희(문학평론가)  |  samdoli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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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12  0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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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마흔이 되기 전에, 본인의 삶을 스스로 끝장낸 작가가 있다. 그는 스무 살에 처음 자살을 기도한 후 다섯 번에 걸쳐 죽고자 했고, 마침내 서른아홉 살에 세상과 절연한다. 근대 일본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이야기다. 언제나 나는 인간이되, 인간의 자격을 잃고 스러지는 이들을 편애해왔다. 다자이 오사무가 목숨을 끊은 해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작품 <EC2E>인간 실격<EC2F> 주인공 ‘요조’도 그렇다. 이 소설은 요조가 남긴 수기가 중심 서사를 이룬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다고 시작되는 요조의 글은,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된 자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본다고 하며 끝난다.
청년과 노년이 한 몸에 융화된 기묘한 형상의 요조가 더 이상 자신은 인간일 수 없다고 고백하는 순간, 공교롭게도 나는 오늘날 한국에 사는 청년과 노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여기에서 비(非)인간으로 내몰리는 청년과 노년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이들은 텅 빈 인간, 인간 아닌 인간이 돼가고 있다. 요조에게는 희한한 버릇이 있다. 그는 명사를 희극 명사와 비극 명사로 자의적으로 분류한다. 예컨대 요조의 사고 체계 안에서 전철과 버스는 희극 명사이고, 증기선과 기차는 비극 명사다. 그는 반의어도 특이하게 규정한다. 하양의 반의어는 빨강, 빨강의 반의어는 검정이라는 식이다.
요조의 놀이에 잠깐 동참해보려 한다. 가령 나이에 비해 빨리 늙어버린 요조가 체현한, 청년과 노년의 양태를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청년과 노년은 희극 명사인가, 비극 명사인가? 현재 우리가 같은 사회를 살고 있다면, 비극 명사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분히 반어적 의도에서 희극 명사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상 청년과 노년은 한 쌍으로 된 한 개의 단어다. 청년과 노년을 가르는 기준은 젊음과 늙음의 차이뿐이다. 청년과 노년은 내재적으로는 반의어지만, 외재적으로는 동의어로 묶인다. 한데 요조의 말마따나 모든 것은 지나간다.
청년 혹은 노년의 자리에서 우리가 겪고, 겪을 일은 돌고 도는 것이다. 청년과 노년의 함의는 변화하며 거듭된다. 특정 범주의 오류는 희극 명사와 비극 명사 중 하나를 고르는 동시에 발생한다.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결정을 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대안의 실마리는 우리가 청년과 노년을 어떤 명사로 획득하느냐와 결부된다. 한국의 청년과 노년은 다 같이 비참해지고 있다. 계속 이대로 놔두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나쁜 쪽을 향해 갈 것이다. 청년과 노년이 비극 명사로 굳어지며, 삶의 동력이 상실되는 비극적 결말을 맞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해보고 실패하는 편이 안타깝게 지켜보고만 있는 것보다는 낫다. 미약하나마 개선 가능성은 그런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된다. 나는 갑작스러운 변혁을 외치는 무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전환이 세계와 그 속에서의 삶 전체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지만 역사는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자행된 끔찍한 여러 사례를 잊지 않고 기록해두었다. 어떤 진리도 황홀한 이상향을 깜짝 선물처럼 안겨주지 않는다. 우리가 기대를 걸어도 좋은 것은 지식을 신봉하는 인간이 아니다. 진리를 수행하는 주체의 진득한 실천이다. 나는 문학이 거기에 이르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내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김현, <EC2E>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EC2F>, <EC2E>김현 문학전집 1<EC2F>, 문학과지성사, 1991, 49~50쪽) 1975년에 한 문학평론가가 쓴 글이다. 그는 문학이 배고픈 거지 한 명 구할 수 없지만, 무용함이야말로 문학의 소중한 가능성이라고 주장했다. 문학의 쓸모없음은 우리를 옥죄는 관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한다.
이것은 문학이 가진 억압 없는 쾌락이다. 동시에 문학은 이냥 저냥 살아왔던 삶에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덧씌워지는 모든 제약을 부정하고, 세계 개조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문학의 가치를 옹호한 견해를 서술했으나) 새삼스레 문학을 절대화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학이라기보다, ‘문학적 삶’이다. 제도 안에서 제도 밖을 상상하는 행위가 문학적 꿈이라고 한다면, 그에 합치하는 모든 작업은 문학적 인자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쾌락 원칙에 자족하지 않고, 그것을 밀고 나가 현실의 결핍과 부정을 드러내는 활동. 이제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그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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