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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져간 동백꽃들, 광장에서 다시금 피어나다·
원영은  |  duddmsdnj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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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30  21: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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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은 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을 맞은 역사적으로 뜻깊은 날이었다. 특히나 올해는 제주도뿐만이 아닌 서울 광화문 등 전국 20여 개 도시에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가 설치돼 더욱 화제가 됐다. 이에 기자는 4월 3일부터 7일까지 설치된 광화문의 분향소와 7일 열린 ‘4·3 70주년 광화문 국민 문화제’(이하 4·3 문화제)에 다녀왔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조선노동당의 무장봉기를 정부가 경찰력과 군을 동원해 진압하던 중 무고한 제주도민이 함께 희생당한 일이다. 해방 이후의 제주는 극심한 실업난, 미군정에 의해 소위 응원 경찰이라고 불리는 친일 경찰들이 대량 입도한 일 등으로 미군과 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이 거센 상태였다. 그러던 중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 대회에서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한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성난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 6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경찰과 도민의 갈등은 더욱 극심해졌다. 이후 남조선노동당 등 350여 명의 좌파 무장대가 남한만의 단선·단정에 반발하면서 경찰서 등을 습격했고 이승만 정부가 군을 통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3만여 명의 민간인들이 함께 희생됐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유달리 추웠던 4월 7일, 기자는 광화문역 2번 출구로 나와 4·3 문화제가 열린 광화문 북광장으로 향했다. 행사는 4·3 정보관, 4·3 분향소를 포함하는 부스운영과 무대공연으로 나뉘어 이뤄졌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전국 각지 22곳에 설치됐다고 하는 4·3 분향소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의 시민들이 무고하게 찢겨나간 4·3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분향소 내부에는 시민들이 두고 간 하얀 국화꽃이 가득했고 제주 4·3 사건을 상징하는 붉은 동백꽃도 곳곳에 놓여있었다. 이곳을 찾은 하예영(이화여자대학교 3학년) 씨는 “사실 이전까진 4·3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번 70주년을 맞이해 나부터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이곳을 찾게 됐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아직도 좌파폭동이라는 것만 강조하는 현실에 한숨이 나온다”고 말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분향소 옆에는 전국을 자전거로 순회한 후 이날 광화문 광장에 도착한 '4370 동백꽃 라이딩‘의 자전거 수백 대가 누워있어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또한 분향소 뒤로는 각양각색의 단체 40여 개에서 설치한 다양한 성격의 부스들이 즐비했다. 서울청년네트워크 부스에서 진행한 종이 동백꽃을 SNS에 인증하고 기념품 받기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곳도 있었지만, 4·3 사건에 대해 미군의 책임을 묻는 서명운동을 진행하는 곳도 있었다. 저녁 6시 40분을 넘어서부턴 본공연이 시작됐다. 제주 방언으로 노래하는 밴드 '사우스카니발', '제주4·3프로젝트밴드', '전인권밴드' 등이 참여해 광화문 북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흥을 돋우고, 잔인한 역사 앞에 스러져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의 김기영 간사에게 4·3 문화제를 주최한 것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는 “70주년을 맞아 광화문에서 제주 4·3 사건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어서 뿌듯했다. 그러나 분향소, 문화제 등과 같은 이러한 일회성 홍보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아 아쉬웠다”며 “제주 4·3 사건이 올바른 역사 교육을 통해 민중 항거의 하나로 주목받게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제주 4·3 사건의 비극은 수십 년간 지속됐다. 이승만 정권 이후 반공·친미 성향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 차원의 진상 조사나 희생자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 조치가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으로 겨우 그 실상이 처음으로 제주 밖으로 드러나게 됐지만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공론화를 막기 위해 압박을 가했다. 결국 1993년에 들어서야 '4·3 특별위원회'가 설치됐으며 2000년에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최근엔 이 특별법조차 희생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조치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에 부족하다며 개정안 제정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이 사건은 서로가 서로를 ‘빨갱이’와 ‘친일파’라고 힐난하는 차가운 진영논리에 파묻혀 수십 년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된 명칭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건이다. 이번 4·3 문화제를 계기로 제주 4·3 사건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지고 피해자들의 명예 또한 회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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