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람, 시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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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 시집가다
  • 황동준
  • 승인 2019.04.0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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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신행'

“파원군 윤평이 숙신옹주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親迎)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430년 12월 22일, 세종은 김종서에게 친영의 예를 조선에 정착시킬 방법에 관해 묻는다. 친영이란 유교의 혼인 육례(六禮) 중 하나로, 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이하는 제도 즉, 시집 제도이다. 이에 김종서는 왕실에서 먼저 시행하면 온 나라에서 따라 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로부터 5년 뒤, 세종은 자신의 이복동생인 숙신옹주를 한반도 역사상 처음 제도적으로 시집을 보냈다. 즉, 시집가는 문화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세종은 자신의 이복 여동생을 시집보내면서까지 ‘친영의 예’를 정착시키려고 한 것일까.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적 토대로 한 신진사대부들이 세운 나라다. 성리학은 종법 제도를 복원해 부계혈통과 장자 상속을 내세워 혈통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목표로 했다. 문제는 종법제도가 한반도의 기존 문화와 맞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조선 중기까지도 고려의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었는데, 고려는 부계중심도 아니었으며 장자 상속의 원칙도 없었고, 결혼제도 또한 중국의 것과 상당히 달랐다.

고려는 대부분의 제도를 당나라로부터 도입해왔지만, 결혼제도와 가족제도는 고려의 기존 풍속을 그대로 유지했다. 당시 결혼 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를 가고, 그 자식들도 여자의 집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고려 시대 남자는 중혼이 가능했다. 남자는 여러 부인을 두었고, 처가들을 순회하며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남녀 모두 재산을 평등하게 상속받아 여자가 남자에게 경제적 의존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균분상속은 남자가 여러 여자와 결혼하여도 경제적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게 했다. 또한 고려에는 근친혼 풍습이 있었다. 태조 왕건은 유력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29명의 여자와 결혼하여 9명의 딸과 2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딸들을 그들의 남형제 혹은 이복동생과 결혼시켰다. 강력한 왕족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원나라는 이를 보고 근친혼을 제도적으로 금지하지만, 이 법은 직계 왕들만 따랐고, 결국 왕실 내 근친혼 풍습은 고려 말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조선의 건국세력에게는 부계중심도 아니고 여자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동성혼과 근친상간까지 이뤄진 고려의 문화는 심각한 문제였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고려사에서는 이들의 모습이 ‘괴이하다’고 표현할 정도다. 하지만 갑자기 이들에게 기존의 문화를 부정하게 하고 중국의 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복여동생을 시집보냄으로써 이 제도를 정착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정착은 쉽지 않았다. 사림파가 대거 등용되고 몇 차례의 사화를 겪고 나서야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되기 시작한다. 이후 조선 11대 왕 중종에 이르러 비로소 ‘친영의 예’를 행하는 첫 왕이 등장하며 조선 중기에 종법제도와 남존여비 사상은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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